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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안내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의 차이

by S D G(Soli Deo Gloria) 2025. 8. 22.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의 차이

서론: 당신은 하나님을 '아십니까', 아니면 '대해' 아십니까?

"스스로 복음주의자라 하는 여러분! 무시당하지 않기를 간청합니다." 이 절박한 외침은 오늘날 기독교, 특히 스스로를 성경의 권위와 복음의 핵심을 붙든다고 자부하는 복음주의 진영이 마주한 심각한 위기를 드러냅니다. 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심지어 신앙 공동체 내에서조차 그 신앙의 진정성을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그 이유는 복음주의자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며 살기보다는, 인간이 만든 전통의 틀에 안주하고, 영적인 풍요가 아닌 물질적 풍요를 신앙의 척도로 삼기 때문이라는 날카로운 지적이 있습니다.

이 문제의 근원은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 즉 '하나님을 아는 것(knowing God)''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knowing about God)'의 차이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만, 실상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재단하고, 복음을 해석하며, 진리의 복음에 인간의 전통, 세속적 풍요, 성공과 같은 가치를 교묘하게 삽입하여 참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외치지만, 그들은 정작 하나님을 모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계속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며 그분이 주시는 참된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믿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선행을 베풀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피 흘리기까지 헌신할지라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의 성경적 의미를 깊이 탐구하고, 후자에 머무를 때 신앙이 어떻게 형식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의 늪에 빠지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 글은 독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정직하게 점검하고, 피상적인 지식의 껍데기를 깨고 나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로 나아가도록 도전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십니까', 아니면 그저 '대해' 알고 있을 뿐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당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I. 두 가지 '앎': 성경이 말하는 지식의 차원

'안다'는 단어는 일상에서 흔하게 사용되지만, 성경은 이 단어에 여러 차원의 깊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해서는, 단순한 정보의 습득을 넘어선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차원을 강조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을 파악하는 첫걸음입니다. 헬라어 원어는 이러한 지식의 다층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1. 정보적 지식 (Knowing About): 신학적 지식과 그 한계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객관적 사실과 정보를 습득하는 지적 활동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경의 역사, 인물, 사건에 대한 지식, 교리적 체계, 조직신학 등을 배우고 이해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신학은 하나님과 그의 세계에 관한 체계적인 학문으로서, 이러한 정보적 지식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종종 사실이나 정보에 대한 앎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 중 하나는 '오이다(οἶδα)'입니다. 이는 경험보다는 지적으로 파악하여 알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물론 이러한 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구원의 계획, 교회의 본질 등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 없이는 신앙은 쉽게 흔들리거나 이단적 사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지적했듯, 복음주의의 근본 진리 중 첫 번째는 성경을 유일하고 충분한 권위로 간주하는 믿음이며, 이는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과 이해를 전제합니다.

그러나 정보적 지식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닙니다. 악마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알고' 믿으며 떱니다(야고보서 2:19). 여기서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지만, 그 지식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성경 전체를 암송하고 모든 신학적 논쟁을 꿰뚫고 있다 할지라도, 그 지식이 삶을 변화시키는 인격적인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명 없는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2. 관계적/체험적 지식 (Knowing): 인격적 만남과 사귐

성경이 궁극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정보의 축적을 넘어선, 인격적인 관계와 살아있는 체험을 통해 얻는 지식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러한 관계적 앎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헬라어 단어는 '기노스코(γινώσκω)'입니다. '기노스코'는 단순한 인지를 넘어, 개인적인 경험과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알아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는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지식(a knowledge grounded on personal experience)을 뜻하며, 구약의 히브리어 '야다(יָדַע)'와 그 의미를 공유합니다. '야다'는 부부가 서로를 육체적, 인격적으로 깊이 아는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될 만큼(창세기 4:1), 친밀하고 전인적인 앎을 함축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노스코'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책을 읽는 것을 넘어 그분과 직접 대화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과 동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지식과 감정, 의지가 모두 동원되는 전인격적인 사귐입니다. 이 관계적 지식이야말로 구원의 본질과 직결됩니다.

핵심 성구: 관계로서의 영생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γινώσκω)이니이다"

이 구절은 영생의 본질이 교리 목록에 대한 동의나 특정 행위의 준수가 아님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영생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고, 친밀하며, 지속적인 관계, 즉 그분들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 그 자체입니다. 이 앎은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닌 '관계적 지식'이며, 구원의 핵심입니다.

3. 성숙한 지식 (Full Knowledge): 분별력과 온전한 앎

성경은 정보적 지식('오이다')과 관계적 지식('기노스코')을 넘어, 더 깊고 완전한 차원의 앎을 제시합니다. 바로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입니다. 이 단어는 '기노스코'에 '위에, 더하여'를 의미하는 접두사 '에피(ἐπί)'가 붙은 형태로, '더욱 완전하고, 정확하며, 성숙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에피그노시스는 단순한 앎을 넘어선 깊은 깨달음과 인식을 포함합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과의 첫 만남이나 초기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그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자라나는 지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바로 이 '에피그노시스'를 구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ἐπίγνωσις)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립보서 1:9-11)

여기서 바울이 구하는 것은 사랑이 맹목적인 감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에피그노시스', 즉 하나님에 대한 깊고 올바른 인식과 '아이스테시스(αἴσθησις)', 즉 실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적 민감성(총명)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 성숙한 지식(에피그노시스)은 사랑을 무분별한 열정이 아닌, 진실하고 분별 있는 성숙한 실천으로 이끕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아는 것이며, 삶 속에서 그분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결국 참된 신앙은 정보적 지식에서 시작하여 관계적 지식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는 성숙한 지식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II. 왜곡된 복음의 함정: '대해 아는 것'에 머무를 때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단지 그분에 '대한' 정보적 지식에만 머무를 때, 신앙은 필연적으로 그 본질을 잃고 여러 가지 형태로 왜곡됩니다. 이러한 신앙은 겉보기에는 경건해 보일지라도, 생명력을 상실한 채 결국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종교 행위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는 오늘날 많은 교회가 직면한 문제의 핵심이며, 복음의 능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입니다.

1. 형식주의 신앙: 전통이 진리를 대체하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에만 치중하는 신앙의 가장 흔한 함정은 형식주의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역동적인 관계에서 오는 기쁨과 확신 대신,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적 전통, 정해진 의식, 혹은 교회 내에서의 직분과 같은 외적인 형태가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형식적 신앙은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안에도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 형식주의의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으며, 십일조와 금식 등 모든 종교적 의무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 부르시며 그들의 외식을 꾸짖으셨습니다(마태복음 23:27). 그 이유는 그들이 율법의 조문은 알았지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교회는 원래 이렇게 해왔다"는 논리가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하심을 가로막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배의 순서, 기도문의 형식, 특정 사역 방식 등 전통 그 자체가 우상이 되어, 살아있는 진리를 가두는 감옥이 됩니다.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만 고백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열매로 나타나는 '생활신앙'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 역시 바리새인의 형식주의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2. 기복주의 신앙: 복음이 성공의 도구가 되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는 것'에 신앙의 초점이 맞춰질 때, 복음은 기복주의로 변질됩니다. 이는 물질적 풍요, 사회적 성공, 육체의 건강과 같은 세속적 가치를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하나님의 축복의 유일한 증거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신앙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경배와 순종의 대상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성취시켜주는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사용자가 지적한 "영적인 풍요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풍요를 즐기기 때문에 무시당한다"는 비판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합니다. 복음의 목적이 '나의 성공'과 '나의 행복'이 될 때, 십자가의 길, 자기 부인, 고난의 영성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에 대한 진노를 선포하기보다, 인간의 자존감을 높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불어넣는 심리 상담처럼 변해갑니다. 그 결과, 고난이나 실패가 닥쳤을 때 이러한 신앙은 쉽게 무너져 내립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들은 쉽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떠나버립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3. 인본주의 신앙: '나'의 열심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다

가장 교묘하고 위험한 함정은 바로 인본주의적 신앙입니다. 이는 기도, 예배, 사역, 헌신 등 모든 경건한 종교적 행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이루어질 때 나타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겉보기에는 하나님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동기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이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열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의 종교적 만족감을 채우고 스스로의 의(self-righteousness)를 쌓는 인본주의적 행위가 되고 맙니다.

경고: 헛된 열심
"그들이 열심히 믿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선행을 하고 그의 모든 일을 다하고 피 흘림을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종교적 만족과 위안을 위한 행위일 뿐입니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신앙은 자신의 열심과 헌신을 근거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며, 은연중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적 태도로 이어집니다.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행위에 기반하기에, 진정한 겸손과 감사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에 머무른 신앙이 도달하는 비참한 종착역입니다.

III. 참된 복음의 핵심: 주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아는 것

형식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라는 왜곡된 복음의 함정을 피하고 참된 신앙 위에 굳건히 서기 위한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의 본질, 그 순수하고 흔들리지 않는 핵심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는 복잡한 신학 체계나 인간의 경건한 행위 목록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명확하고 인격적인 고백에 달려 있습니다: "나에게 예수는 누구십니까?"

1. 복음의 유일한 중심: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

복음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로 수렴됩니다. 그분이 나의 삶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가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가르는 결정적인 시금석입니다. 성경이 선포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 나의 주(Lord)와 그리스도(Christ, 구원자)가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입술로만 하는 동의가 아니라, 삶의 모든 주권이 나에게서 그분께로 이전되었음을 선포하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 충만했던 베드로가 군중을 향해 외쳤던 첫 설교의 결론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구약의 예언과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을 장황하게 설명한 뒤, 이 모든 것이 귀결되는 단 하나의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핵심 성구: 복음의 최종 선언
사도행전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 선포는 기독교 신앙의 심장입니다. 예수는 위대한 스승이나 도덕적 모범을 넘어, 만물의 통치자이신 '주'이시며, 우리의 죄를 해결할 유일한 구원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사실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분께 삶의 왕좌를 내어드리는 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이자 전부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직분과 명성을 가졌을지라도,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어 기도하고, 예배하고, 사역하고, 헌신했을지라도, 그의 삶 속에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의 위치에 계시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거짓이며 가짜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흡사 매주 금식하고 십일조를 내며 율법을 지킨다고 성전에서 자랑스럽게 떠들던 바리새인의 자기 의와 다를 바 없습니다.

2. 더하거나 빼지 말라: 순수한 복음의 능력

복음의 핵심이 '주와 그리스도 되신 예수'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면, 우리는 '예수 + α'의 모든 시도를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순수한 복음에 무언가를 덧붙이려는 시도의 연속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유대주의자들은 '예수 + 할례와 율법'을 주장했습니다. 중세 교회는 '예수 + 교회의 전통과 선행'을 가르쳤습니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예수 + 물질적 축복'을, 또 다른 이들은 '예수 + 사회적 정의 실현'을 복음의 필수 요소처럼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른 복음은 없나니"라고 단호하게 선언하며,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에 무언가를 더하려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갈라디아서 1:6-9). 복음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인간의 어떤 공로나 전통, 가치관도 더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믿음을 통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이단과 정통을 가르는 핵심 기준 중 하나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 위에 인간의 공로를 어떤 형태로든 보태려는 시도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4:6). 그분 외에 다른 길은 없으며, 그분의 진리에 다른 것을 섞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닙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에 다른 것을 절대로 덧붙여서는 안 됩니다.

3. 참된 앎의 열매: 삶의 주권 이전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아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주인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이전에는 '나'의 영광과 만족, 성공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는 '주님'의 영광과 그분의 뜻을 위해 사는 삶으로의 완전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참으로 안다는 것의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 즉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7:18).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그의 삶에서는 반드시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과정은 더디고 때로는 넘어질 수도 있지만, 삶의 방향성 자체가 변화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삶의 구체적인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내가 여전히 내 삶의 주인 노릇을 하며 내 뜻대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다면, 나는 아직 예수님을 나의 '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앎은 반드시 삶의 주권 이양이라는 열매를 동반합니다.

IV. 묵상과 적용: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의 차이, 그리고 그 차이가 만들어내는 엄청난 결과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고,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이 글을 읽는 진정한 목적입니다.

✨ 핵심 정리 (Key Takeaway)

  • 정보적 지식 vs. 관계적 지식: 하나님에 대한 정보는 신앙의 기초이지만, 구원의 핵심은 그분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사귀는 관계적 앎에 있습니다.
  • 피상적 앎의 위험: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에 머무르면 신앙은 형식주의, 기복주의, 인본주의의 함정에 빠져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 복음의 유일한 핵심: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Lord)'와 '그리스도(Christ)'로 인격적으로 아는 것만이 참된 신앙의 시작이자 전부입니다.
  • 참된 앎의 증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반드시 삶의 주권이 '나'에게서 '주님'께로 이전되는 구체적인 순종의 열매로 증명됩니다.

🙏 묵상과 점검 (Checklist)

  • 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 매일의 삶 속에서 진실한 대화와 깊은 묵상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가?
  • 나의 기도와 신앙생활의 동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그분 자체를 사랑하고 더 알기 위한 것'인가?
  •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내가 아니라 주님이 최종 결정권자가 되시는가?
  • 나의 신앙이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위나 지식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고 있는가?

💡 삶의 실제적 적용 (Action List)

  • 매일 10분씩 조용한 시간을 정해 성경을 한두 구절만이라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에 기도로 반응하며 기록하십시오.
  • 오늘 하루 동안 경험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인정을 의식하는 대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며 작은 순종을 실천하십시오.
  • 당신이 가장 의지하고 있는 것(돈, 명예, 지식, 사람 등)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훈련을 시작하십시오.

결론: 참된 앎으로 말미암는 참된 자유와 생명

결론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습니다. 전자는 우리를 교만한 바리새인, 기복적인 신앙 소비자, 혹은 자기 의에 빠진 종교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전통과 욕망이 덧씌워진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를 옭아맬 뿐입니다. 그러나 후자, 즉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관계적으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만이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빚어갑니다.

이 참된 앎은 복음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와 구원자 되신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분을 아는 지식 안에서 우리의 옛사람은 죽고, 그분의 형상을 닮은 새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우리의 열심이 아닌 그분의 은혜를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 다시 한번 간청합니다. 더 이상 생명 없는 지식과 전통에 머물지 마십시오. 세상의 풍요와 성공을 좇는 헛된 신앙을 버리십시오. 당신의 열심과 공로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오직 주와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일에 당신의 삶을 던지십시오. 그 앎 속에서 당신은 세상이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참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여기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그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요한복음 14:6). 그분을 인격적으로 알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죄와 율법과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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