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기적: 믿음뿐입니다
절름발이 신앙을 버리고 온전한 믿음으로
글의 핵심 요약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9:14~17 말씀을 통해 형식에 매인 절름발이 신앙과 참된 믿음의 극명한 차이를 살펴봅니다. 바리새인과 요한의 제자들이 보여준 자기 의와 고집, 말씀의 본질을 외면한 행위 중심의 신앙이 어떻게 예수님의 기적을 가로막고, 구원의 기회를 놓치게 하는지 조명합니다. 이 글은 우리가 허울뿐인 경건을 버리고, 긍휼과 사랑, 그리고 말씀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서론: 절름발이 신앙이란?
오늘부터 3주 동안 참믿음과 형식에 매인 절름발이 신앙의 극명한 차이를 보고자 합니다. 믿음으로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에서조차 거짓되고 허망한 형식을 버리지 못해 참 구원의 주를 몰라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주를 향한 온전한 믿음, 말씀의 본질을 바르게 믿고 따르는 삶에 대한 지혜와 기적의 믿음을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오늘은 믿음의 자리에서 자신의 의를 버리지 못해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통해 절름발이 신앙이 어떤 신앙인지 살펴봅시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경건: 죄인과의 식사 논쟁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4절의 그때는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세리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할 때입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세리집에 당연히 세리가 올 것이고 당시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낙인 찍힌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리의 집에서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천대하고 무시하는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이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당시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자부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따지기 시작합니다.
죄인들과 함께 먹는 것이 왜 문제인가?
그들의 첫 번째 질문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서 왜 죄인들과 함께 먹으면서 구별되지 못하게 행동하느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바리새인들의 말은 “죄를 사하는 권능을 스스로 가졌다고 말하는 거룩한 사람이라면서 왜!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 는 겁니다. 왜? 이들이 화가 났을까요? 그것은 경건에 대한 심각한 오류 때문입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경건의 중심은 마음에 있지 않고 행위에 있는 경건이었습니다. 그들의 경건은 눈에 보이는 불결한 것은 피하고 더러운 것은 멀리하는 것이 그들이 아는 경건입니다. 또한 그들이 믿는 경건은 사람들이 만든 수많은 규범과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그들이 믿고 아는 경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말씀보다 사람들이 만든 규범과 규칙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것이 참믿음이며 경건한 삶이라고 철저히 신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그들에게는 도저히 하면 안 되는 것이고 놀란의 여지가 아주 많은 비난 받기 좋은 행동이었습니다. 이들의 경건은 이분법에 기초한 거라는 것을 11절에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점: 의사가 필요한 곳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관점과는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에게는 세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처럼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낙인 찍힌 사람들을 병든 사람으로 보십니다. 이들은 죄인이며 상종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라고 배척하기 급급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너희들이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이들은 마음이 병들고 삶이 병든 아픈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과 같은 그릇된 자기 확신 신념이 신앙이라는 옷을 입으면 이렇게 판단하고 분리하는 사람이 됩니다. 혹시 누군가를 보면서 “ 저 사람은 가망 없어, 저 사람은 구제 불능이야, 저 사람과는 말을 썩지 말아야 해”라고 이야기한 일은 없습니까?
자기는 의롭고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것처럼 말하면서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고 단정하고 편견과 선입견으로 사람을 제단 하는 말과 행동을 한 일은 없습니까?
여러분! 이런 신앙의 수준으로 결코 온전하신 주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결코 이런 절름발이 믿음으로는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주인공이 되지 못합니다.
11절과 같이 말하는 바리새인들의 본심은 “나는 너희들과는 달라! 이 죄인들아”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요! 왜! 이들이 이런 것을 경건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이런 어리석은 교만과 거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심각한 오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긍휼
예수님은 참된 경건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화려한 형식이 있는 제사가 그들에게는 경건에 이르는 예배였을지는 몰라도 예수님은 이런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긍휼한 마음이라고 말씀하시며 이들의 위선을 들어 내십니다.
말씀이 인도하는 길을 가지 않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면서 주를 위해 산다고 말하지 맙시다. 이런 어리석음이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규정하고 제단 해 하나님이 기뻐하는 말씀이 아니라 자신이 기뻐하는 거짓된 말씀으로 망치는 사람입니다. 이런 절름발이로 살지 맙시다.
주님은 화려한 제사가 아니라 죄인 한 사람이 참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지금 우리도 그동안 종교적인 관습과 규범에 익숙해져서 말씀의 본질에 어긋한 말과 행동을 하지는 않습니까?
요한 제자들의 고집스러운 질문: 금식 논쟁
안타까운 것은 바리새인 뿐 아니라 요한의 제자들 역시 절름발이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들이 옳다는 것만 증명하려는 어리석은 노력을 이들은 지속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왜! 먹느냐고 따지 더니 요한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이렇게 자기의 생각과 뜻을 굽히지 않고 예수님이 가르치셔도 듣지 않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이런 무모하고 무지한 고집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바랍니다.
모르면 몰라서 그렇다지만 성경을 얼마나 이들이 많이 압니까? 그러나 이들의 아는 것은 그저 문자였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본뜻은 모른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달달 외워도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이렇게 고집과 아집으로 바른 말씀을 듣지 못하는 고집스럽고 거만한 절름발이가 될 뿐입니다.
죄인과 멀리하는 것이 경건이라고 말하더니 이제는 먹지 않고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 경건이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적 형식주의에 매여 누구보다 부지런히 예식과 법을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종교 예식과 형식이 더 이상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행위들에 만족한 나머지 예수님이 주시는 진짜 말씀을 듣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의를 꺾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이러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할 뿐 아니라 기적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이 바로 형식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절름발이 신앙 아무런 생명의 능력이 없는 거짓 신앙입니다. 또한 14절에 보면 이들은 자신들의 거짓된 경건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기도 합니다.
금식의 참된 의미와 때
그들은 자신들은 일주일에 삼일을 금식하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남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고 자신을 자랑하는 자랑거리로 삼은 금식이 어떻게 경건에 이르게 하겠습니까? 진짜 금식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금식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금식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회개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입니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또 금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회복을 구할 때입니다.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받던 첫 해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이렇게 금식의 때는 몸과 마음을 다해 간절한 심정으로 주님께 나가는 것이 금식입니다. 바리새인과 요한의 제자들처럼 형식과 습관을 따라 굶는 것이 아닙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 비유: 형식에 매인 신앙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거짓된 경건을 향해 버려야 할 가치 없는 것을 귀한 보물인 것처럼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사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16절과 17절의 예수님의 비유는 간단합니다. 정말 귀한 것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모호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하고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 삶은 모호하며 이중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깨닫지 못한 것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는 잣대를 들이대고 지키지 못하면 정죄하니 그들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마음을 좌절시키고 바른 믿음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실족하게 하는 큰 걸림돌일 뿐입니다.
새 옷을 잘라 조각을 내서 낡고 구멍 난 버릴 옷에 붙이는 사람이 정상은 아닙니다. 또 어렵게 수고하고 농사지은 신선한 포도주를 더럽고 낡은 부대에 넣는 사람은 헛수고한 사람입니다. 이런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어린아이도 하지 않는 이런 실수를 아주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자신들처럼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비난하며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일까요? 참으로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주를 향한 열심과 섬김으로 예배하며 주님 안에 살았다고 자부할지는 몰라도 그 만족은 분명 심각한 착각입니다.
말씀의 본질은 하나님의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수많은 성경의 말씀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참 신앙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알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참 신앙은 자기의 고집과 아집과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살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을 만났지만 만나지 못한 불행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기껏 맛있는 밥을 열심히 차려 놓고 발로 차서 엎어 버리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 아닐까요? 이런 사람들의 열심과 노력은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하는 도구가 될 뿐입니다.
절름발이 신앙의 특징
자기 의와 판단
자신의 의를 버리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행위로 타인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형식과 관습에 매임
말씀의 본질보다 사람들이 만든 규범이나 종교적 형식, 습관을 더 소중히 여깁니다.
말씀의 본질 왜곡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알거나 자신의 생각대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참뜻을 놓칩니다.
고집과 아집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과 뜻을 굽히지 않아 변화를 거부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며
지금 우리의 신앙은 온전한 발걸음입니까? 우리 신앙에는 자기 착각과 오류 그리고 고집과 아집은 없습니까? 내가 믿고 싶은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적을 보면서 판단하며 비판을 일삼지는 않습니까?
본질을 무시하면 허울만 남습니다. 본질을 거부하면 끝없는 망상과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신앙이 이렇게 절름발이 신앙으로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을 깊이 알고 바르게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삶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고 주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십시오! 바른 지혜로 예배하며 섬기며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예배와 섬김과 순종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며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힘이 되길 바랍니다.
핵심 정리
- 절름발이 신앙은 자기 의, 형식주의, 말씀의 본질 왜곡, 그리고 고집으로 인해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행위보다 긍휼과 사랑, 그리고 마음의 변화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 참된 금식은 외적인 금식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믿음의 과정입니다.
- 새로운 복음과 은혜는 새로운 마음과 태도('새 부대')로 받아들여져야 온전히 보전될 수 있습니다.
묵상과 점검
- 나는 혹시 바리새인이나 요한의 제자들처럼 형식적인 경건에 갇혀 있지는 않습니까?
- 내 안에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기 의는 없습니까? 나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알고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여 나의 고집과 아집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나의 낡은 생각이나 관습에 끼워 맞추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삶의 실제적 적용
- 이번 한 주 동안, 내가 가진 신앙의 '형식'이나 '규칙' 이면에 숨겨진 하나님의 마음과 본질적인 의미를 깊이 묵상하십시오.
- 내 주변의 연약한 이들을 향해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지 찾아보고 행동하십시오.
- 고집과 아집을 버리고, 성경 말씀 앞에서 나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며 겸손히 배우는 태도를 가지십시오.
- 새로운 은혜와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의 마음이 '새 부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변화를 위한 노력을 시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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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변화를 위한 새 부대
예수님의 비유는 단지 옷이나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 신앙의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새 포도주, 즉 예수님을 통해 오신 새 언약과 복음은 낡은 가죽 부대, 즉 구약의 율법주의적 형식과 인간의 고정관념에 담길 수 없습니다. 새로운 은혜와 진리는 우리 안의 낡은 생각과 태도를 깨뜨리고 새로운 마음과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절름발이 신앙은 이 '새 부대'가 되기를 거부하고 낡은 것에 집착하며 결국 진정한 생명과 기적을 놓치게 됩니다.